• 2025. 9. 27.

    by. info-o

     

    전유성 추모글 썸네일

     

    [목차]

     

    한국 코미디계의 대부 전유성이 2025년 9월 25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유성의 프로필과 업적, 결혼 생활, 마지막 투병과 동료 추모까지 사실 기반으로 정리했습니다. 고인을 기리며 그의 유산을 돌아봅니다.

     

     

     

    서론|전유성, 한국 코미디의 큰 별이 지다

     

    반세기 동안 한국 예능·코미디의 방향을 틀어 놓은 사람이 있습니다. 대본 작가에서 무대 위 희극인, 공연 기획자와 스승에 이르기까지, 고(故) 전유성은 '말맛'과 아이디어로 시대를 풍자했고 수많은 후배를 길러냈습니다. 2025년 9월 25일 밤, 향년 76세로 영면하셨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폐기흉(자발성 기흉) 관련 증세가 악화하며 전북대병원에서 별세했고,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되었습니다. 장례는 희극인장으로 치러질 예정입니다.

     

     

    전유성 프로필 한눈에|작가→희극인→기획자·스승

    • 본명 전유성(1949~2025). 서울 출생.
    • 데뷔 1960년대 말 TBC·MBC 특채 방송작가 → 이후 희극인으로 전환.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으로 대중적 사랑.
    • 화법 슬랩스틱보다 '말로 웃기는' 스타일을 확립, 사회 풍자와 촌철 살인 멘트로 영향력 확대.
    • 기여 '개그맨' 용어 대중화·1990년대 공개 코미디(개그콘서트 원안) 붐에 기여, 극단·전용극장 운영 및 지역 문화행사 기획 등 다방면 활동.

    대표 연표

    • 1968~69 방송작가 진출 → 1970~80년대 공중파 코미디 전성기 주역('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 1990년대 공개 코미디 붐('개그콘서트' 원안 참여)과 대학로 소극장 문화 확산에 기여.
    • 예원예대 코미디학과 등에서 후학 양성, 극단 '코미디 시장'·지역 공연·전용극장 운영 등.

     

     

    전유성의 업적|'말의 힘'으로 판을 바꾸다

     

    언어 기반 코미디의 정착

    몸개그 중심의 흐름 속에서 '느림·정적·언어유희'로 웃음을 빚어, TV 흐름에 새로운 호흡을 제시했습니다. 특유의 느리고 무덤덤한 표정과 말투 그리고 통찰력있는 농담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잘 웃지 않는 성향을 활용해 90년대 SBS '좋은 친구들'에서 '전유성을 웃겨라'라는 코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갈갈이 박준형이 일반인 신분으로 나와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개그맨' 용어의 대중화

     

    '코미디언' 대신 '개그맨' 호칭을 처음 사용하고 널리 퍼뜨렸습니다.

     

     

    공개 코미디의 토대 마련

     

    대학로의 소극장 개그를 방송으로 확장하고 MBC 개그콘서트 기획 원안에 참여, 그 후 20여 년 이어진 공개 코미디 시대의 출발점에 섰다는 평가입니다. 결과적으로 방송3사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죠.

     

    후배 양성과 커뮤니티 구축

     

    극단·전용극장·학과 교육을 통해 안상태, 김대범, 황현희, 박휘순, 신봉선, 김민경 등 수많은 후배를 길러냈고,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어 '코미디 대부'라는 수식어로 불렸습니다. 개그맨 뿐만 아니라 이문세, 주병진, 가수 김현식의 방송 입문에도 전유성의 권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김신영·조세호 등 제자들이 추모 글로 고마움을 전했습니다. 과거 이수만이 SM 아이돌 중에서 슈퍼주니어 이특, 희철, 신동을 전유성에게 보내 개그 특훈을 받게 한 일화가 있습니다.

     

    저서와 어록

     

    '컴퓨터,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라는 책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으실 텐데, 이 책으로 정보통신부에서 상까지 받게 됩니다. PC통신, 인터넷까지 시리즈를 집필했습니다. ‘남의 문화유산 답사기’,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하지 말라는 것은 다 재미있다’, ‘전유성의 구라 삼국지’ 등 여러 저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제자 김신영이 "한물갔다"고 자책하자, "한물, 두물 가면 넌 보물이 된다"고 응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유성 특유의 재치와 따스함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홍렬이 상갓집 조의금 봉투에 근조, 조의 쓰는 것이 어렵다고 하자 "쯔쯔라고 써"라고 했다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고, 엄격한 개그맨 군기 문화에 대해 "군기는 군대에서만 세면 되는 것", "나는 외모 비하하는 개그를 못하게 한다" 등 개그계에 일침을 가하며 자신의 소신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먼저 가 있을테니 가서 만나자"며 김학래와의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결혼 생활|진미령과의 인연, 그리고 각자의 길

     

    가수 진미령 씨와 1990년대 초 결혼식을 올렸고, 오랜 기간 사실혼 관계로 알려졌습니다. 두 사람은 2011년께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진미령이 과거 인터뷰에서 “호적에 둘째 부인으로 기록되는 게 너무 싫어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취지의 발언도 전해집니다. 또한 과거 한 TV 프로그램에서 냉면 먹는 짧은 순간도 기다려주지 못하는 전유성을 보며 이혼을 결심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전유성이 밝힌 이혼 사유는 억대 사기를 당하면서 진미령의 말을 무시하고 돈까지 물리게 한 것이 결정적 원인이 됐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투병|코로나 후유증·폐질환·폐기흉 보도

     

    최근 1~2년 사이 코로나19 후유증, 폐렴·부정맥 등의 건강 악화가 반복됐고, 2025년에는 폐기흉 치료와 재입원이 이어졌다는 보도가 있습니다. 9월 25일 밤 전북대병원에서 임종하셨고, 따님이 곁을 지킨 것으로 전해집니다.

     

     

    FAQ|독자분들이 자주 묻는 질문

     

    Q1. 공식 사인은 무엇인가요?

    보도에 따르면 폐기흉(자발성 기흉) 증세 악화로 전북대병원에서 별세했습니다.

    Q2. 결혼·가족 관계는 어떻게 되나요?

    가수 진미령 씨와 오랜 사실혼·별거 보도가 있으며, 자료마다 법적 표기(혼인·이혼) 표현이 다릅니다. 고인의 사생활을 존중해 사실혼·별거로 신중히 표기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Q3. 대표 업적은 무엇으로 꼽나요?

    언어 중심 개그의 정착, '개그맨' 용어 대중화, 공개 코미디(개그콘서트 원안) 토대, 극단·전용극장·학과를 통한 후배 양성입니다.

     

     

    결론|웃음을 넘어, '좋은 어른'의 유산

     

    전유성은 무대 위의 명인(名人)이자, 무대 밖의 스승이었습니다. 한국 코미디의 언어·형식·생태계를 동시에 넓힌 드문 창작자이기도 했습니다. 남겨진 기록과 공연, 제자들의 웃음 속에서 그의 유산은 오래 기억될 것입니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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